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카이로 회담 (문단 편집) === 11월 23일 === 11월 23일 오전 11시, 루스벨트의 숙소에서 3개국 정상들이 참석한 미영중 본회의가 열렸다. 맨 먼저 루스벨트 대통령이 개회사를 하면서 중국의 참가 의의에 대해 강조했다. 이어 마운트배튼이 버마 작전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혔고 처칠과 장제스가 자신의 의견에 대해 개진함으로 본격적으로 카이로 회담이 열리게 되었다. 당연히 중요 문제인 군사 문제가 거론되었다. 주로 동남아시아의 대일작전에 관한 것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핵심이 버마 작전이었다. 장제스는 일본의 주요 작전 지역은 버마, 화북, 만주라면서 버마 작전이 중요하다고 주장, 육해군의 공동작전이 버마 작전의 관건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버마 작전에 관심이 없던 처칠이 장제스의 견해에 반대하면서 둘간의 마찰이 벌어졌다. 처칠은 육군 병력만으로도 충분히 버마 전역의 방어전을 수행할 수 있다고 했으며 영국의 해군병력이 버마로 집결하는 시기에 대해서도 회피했다. 마운트배튼은 대놓고 장제스 때문에 완전히 미쳐버릴 것 같았다고 일기에서 비난했다. 루스벨트는 이중에서 장제스의 의견을 수용하여 장제스에게 2,3개월 안에 벵골만에서 응분의 육해공 작전을 벌일 것이라고 약속했다. 이외에 유럽 전선 문제도 부차적으로 언급되었다. 이후로는 그날 공식일정에 따라 오후 1시 30분에 미영 2개국 정상의 오찬회동, 2시 30분에 메나하우스에서 미영중 3개국 연합참모회의, 저녁 8시에 미중 2개국 정상의 만찬회동이 열렸다. 장제스와 루스벨트는 11시까지 토론을 계속했고 이는 처칠이 표현한 '대화에 갇힌 시간'이었다. 이날의 주요 주제는 정치문제였다. 장제스는 미영소중 4개국 또는 연합국의 기구 설립에 관한 문제, 과도 기간의 국제 안전에 관한 문제, 독일의 투항에 관한 문제, 극동에 관한 문제 이렇게 4가지 주제를 염두에 두고 루스벨트를 만났다. 장제스는 먼저 루스벨트에게 중국의 정치 상황에 대해 제안해달라고 제의했다. 이에 루스벨트와 장제스는 '원만한 대화'를 해나갔고 3가지 사안에 대해 합의를 보았다. 일본이 약탈한 만주, 타이완, 팽호 제도 등의 중국 영토의 반환, 일본이 강점한 태평양 영토의 독립, 그리고 '''한국의 독립'''과 일본의 중국 공사(公私)산업의 중국 접수였다. 이 중에서 중국이 일본이 가지고 있는 중국 공사산업을 접수하는 것에 대해서는 루스벨트는 즉각적으로 동의했으나 한국의 자유와 독립 재건 문제에 관해선 어떻게 할 것이지 차후에 중미 양국이 조율하여 '한국 인민의 목적'을 달성하기로 합의했다. 이외에도 두 사람은 여러 주제를 가지고 토론했는데, 장제스는 일기에서 자신이 전후 일본인들이 전후 자국의 국가체제 문제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게 하자고 루스벨트를 설득했다고 한다. 루스벨트는 천황제의 폐지 여부에 대해 장제스에게 물었고 장제스는 일본 국민의 선택에 맡겨야 한다고 했다. 즉 일본의 천황제 존치 여부를 일본인들의 손에 맡기자고 주장했고, 그것을 루스벨트가 수용했다고 한 것이다. 그리고 소련과 소련 공산주의 문제는 장제스 자신이 '소련 사람들을 깊이 신뢰할 수 없다'는 이유로 유보적인 입장을 드러냈음에도 루스벨트의 의견을 자신이 수용했다고 했다. 그리고 오키나와는 추후 국제적 신탁통치 하에 두기로 했으며 조선과 더불어 베트남을 비롯한 인도차이나의 독립을 추구했다. 그리고 뤼순 항구에 경우에는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미중이 공동으로 운영하기로 했다. 또한 일본의 전쟁배상금 문제[* 장제스는 일본이 배상을 지불해야 하며 이는 산업설비, 함선, 철도차량 등의 현물의 형태라도 좋다고 했다. 루스벨트는 이에 동의했다.], 신장성 문제, 소련의 대일 참전 문제, 중미 연합 참모본부 등의 의제가 다뤄졌다. 한편으로 루스벨트는 중국에 더 지도적인 위치를 주문했지만 장제스는 그런 위치는 미국이 맡아야 한다고 거부함으로 둘의 대화는 이상한 교착 상태에 빠졌었던 모양이다. 회담 이후 장제스는 회담에 대해 11월 23일의 일기에서 대단히 만족스러웠다고 기뻐했다. 하지만 루스벨트는 장제스와의 만남에 큰 기대를 걸었던 모양이지만, 그와 만나곤 기대했던 이미지와 달라 실망했던 모양이었다. 11월 24일 아침 앨리엇 루스벨트가 카이로에 도착해 아버지를 찾아보자 루스벨트 대통령은 침대에서 아침을 먹고 있었다. 앨리엇 루스벨트가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자 루스벨트는 흥분하여 '많은 일이 있었다'고 두 번 반복했다. 그는 피라미드와 테헤란 회담 개최를 확인하는 스탈린의 전문을 말했으나 장제스에 대해서는 장제스와 만났다고 할 뿐이었다. 앨리엇이 장제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루스벨트는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고 한다. 레이 황 교수는 루스벨트가 장제스에게 실망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추측하고 있다. ||...내 추측이 맞는다면, 그의 실망감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장제스 총통은 가까운 거리에서 볼 때 카리스마가 거의 없었다. 그에 대한 전설은 주로, 오랜 역사의 나라와 거대한 민중을 이끌어 위대한 모험에 나서도록 하고 고달프고 지루한 인내의 시험을 통과하도록 만든 그의 초인적인 의지력으로부터 생성된 것이었다. 이것을 제외하면 그는 아무런 마법적인 힘도 갖고 있지 않았고 어떠한 기적을 낳은 것도 아니었다. 사실 루스벨트 대통령이야말로 장제스의 기적이었다. 장제스의 위대함을 평가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 사람을 역사의 전체 맥락 속에 되돌려 놓아야 한다. 그 맥락에서 벗어난다면 그의 존재와 그의 지적 능력 -힘 있고 진솔하지만 폽이 좁은- 은 강한 인상을 심어주지 못할 것이다. 딱딱 끊어지는 목소리와 무미건조한 어휘는 그가 새로운 친구를 얻는데 도움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딱딱한 태도는 타오를 것같은 열정으로 충만한 사람이었던 루스벨트에게 거의 매력이 없었다. 다른 한편, 장제스 총통은 자신의 모든 말을 쑹메이링에게 전달시켜야만 했는데 이는 그에게 거의 이익이 되질 못했다. 이미 루스벨트는 그녀를 가리켜 '기회주의자'라고 부르고 있었다.|| ||장제스 일기를 읽다, 레이 황, 372~373페이지.|| 이와 별개로 처칠과 마셜 간의 만찬이 저녁에 거행되었는데 자세한 시간은 알려져 있지 않다. 장제스와 루스벨트의 회담이 끝난 후 루스벨트는 만찬에 동석했던 해리 홉킨스 특별보좌관에게 장제스와 합의를 본 사안을 반영하여 즉시 선언문의 초안을 작성할 것을 지시했다. 그 덕분에 카이로 선언에서 한국의 독립 문제와 중국의 영토 반환이 거론되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